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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인들의 한라산 소주

by 꼬부남편 2021.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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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지친 마음을 달래려 삼삼오오 가까운 흑돼지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술을 정말 좋아하는 한 직원이 이렇게 주문을 한다.

 

'한라산 하얀거 히야시 안된거 줍서!'

 

한라산소주의 맛을 정확히 느낄 줄 아는 직원이다.

한라산소주는 흰색 병에 담긴 보통 소주와 여성분들을 위해 도수를 낮춘 초록색 병의 순한 소주가 있는데,

보통 제주도 남자들은 흰색 병에 담긴 한라산소주를 마신다.

 

 

 

( 최근 순한 소주는 '올래'라는 이름을 붙였다.)

 

히야시 안된 소주라 함은 냉장보관하지 않은 한라산소주를 말한다.
보통 소주는 시원하게 마시는 것이 보통이라면

한라산소주는 미야시 안된, 즉 미지근한 상태로 마시는 것이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정확히 한라산소주의 맛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은
제주가 아닌 다른 지방에 가서도 꼭 한라산소주만 찾게 된다.

사람마다 느끼는 맛이야 천차만별이겠지마는 많은 제주인들이 한결같이
'한라산 하얀거 히야시 안된 것' 을 찾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히야시 안된 소주를 달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실온보관된 한라산소주를 건네주는 이모.

시원하지 않은 소주라면 너무 써서 먹기 힘들지 않겠냐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테지만,

목구멍으로 털어넣는 순간 독한듯하면서도 부드럽게 넘어가는 소주를 경험할 수 있다.

 

부드러운 한라산소주 한 모금과 함께 멜젓(멸치젓갈) 듬뿍 찍은 흑돼지 한점,

이 투톱은 가히 호날두와 메시가 한팀이 되어 축구를 하는 듯한 환상이 있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 주도에는 다음과 같이 술 취하는 과정이 있다고 한다.

 

1. 해구(解口)

일상의 잠금장치가 느슨해지며 입이 열린다.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이 튀어나오고 남자들의 없던 용기가 생기는 경지다.

 

2. 해색(解色)

미운 것이 예뻐 보인다고, 꼴보기 싫던 사람이 아름답게 용서되고 참하게 보인다.

마른 가지에 갑자기 오색단풍이 피어나듯 주위가 아름답게 보인다.

 

3. 해원(解怨)

억눌려있던 분통이나 원한이 터져 나온다. 가히 무아지경이라고 할 수 있다.

 

4. 해망(解妄)

해망이라 함은 추한 낙화이다. 인사불성의 경지로 눈앞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한라산소주는 독한듯하면서도 뒤끝없이 해색의 경지까지 자연스레 인도한다.

네온사인 반짝이는 시간, 삼삼오오 둘러앉아 한라산소주잔을 띄우는 우리네 정겨운 광경은
멀리 이태백이 물속의 달을 건지던 정경보다 훨씬 낭만적이다.

 

역시 한라산소주의 묘미가 최고로 발휘되는 때는 역시 '퇴근 후 한잔'이 아닐까?

갖은 고충을 함께하는 직원들과 따뜻하고 정겨운 기운을 품으니

향기가 날리며 삼라만상이 안주가 되어 꽃이 피고 새가 우는듯 하다.

 

오늘도 우리는 고깃집에 둘러앉아 이모님께 이렇게 외친다.


'한라산 하얀거 히야시 안된거 한병 더 줍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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